'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를 외친 햄릿을 만나다 + 공연 읽어주는 역장



인천시민평가단으로 활동하고 있어 지난 12월 3일 햄릿을 보게 되었다. 인천시립극단에서는 햄릿을 어떻게 해석했을까가 궁금했었는데 원극을 최대한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한 흔적과 더불어 2시간 공연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했던 연극이었다. 사실 이 리뷰를 늦게 쓰게 된 이유는 원작을 읽어보기 위함이었는데 연극을 통해 어느 정도의 내용을 알게 되니 더 흥미를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햄릿은 과연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햄릿에 대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분들은 '복수' 라는 단어를 생각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복수심만 있는 것인지 또 그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였는지가 이 연극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원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우리 시대와 어울리는 이야기로 펼쳐져야 공감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유부단함이 아닌 고뇌하는 인간으로서 햄릿


햄릿은 클로디어스가 자신의 형인 햄릿 왕을 독살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왕의 자리와 햄릿 왕의 아내, 거트루드를 차지하기 위해 꾸민 클로디어스의 살인이 햄릿 왕의 유령에 의해 밝혀지면서 아들 햄릿 왕자의 고뇌가 시작된다. 그 사실을 아는 건 햄릿 왕자 일행과 관객뿐인데 햄릿 왕자가 고뇌하며 외치는 말들은 한번 들어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논리적인 글 솜씨에 종교적인 부분도 같이 곁들어 있으며 또한 그 시대의 조혼제도까지 한데 뭉쳐져 있어 복잡한 부분이 분명 있다. 그래서 햄릿이 토해 내는 그 말 덩어리들을 계속 곱씹게 된다. 가령 다음과 같이 그가 혼자서 말하는 부분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부분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거나, 아니면 고통의 큰 물결을 무기로 맞닥뜨려 끝내 버리는, 그 어느 것이 더 떳떳한 생각일까? 잠들면 꿈을 꾸겠지- 아, 여기서 걸리는 구나. 이 필멸의 육신이 고리를 벗을 때, 죽음의 꿈속에서 어떤 꿈이 꿔질까 하는 그것이 기필코 우릴 망설이게 한다.
나그네가 일단 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못 돌아오는 미지의 나라, 죽음의 다음에 있을 그 뭔가에 대한 두려움이 결심을 흐트리고,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로 날아가기 보다는 현재의 사악한 땅에 우리를 눌러 있게 한다.
때문에 우유부단함으로 자칫 인식될 햄릿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인천시립극단에서는 고뇌하는 인간으로서의 햄릿을 그려내었다. 그가 냉철하게 숙부인 클로디어스의 죄를 밝히기 위해 광대를 끌어들려 '무언극'을 하게 하고 그 무언극 속에서 클로디어스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극중 왕을 죽이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갈등은 점차 빨라진다.

재미있는 것은 클로디어스가 이 연극을 본 이후 햄릿이 자신의 죄를 알고 있다고 믿어 그를 영국으로 망명시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자신의 형을 죽인 그 살인에 대해서는 고해성사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언발에 오줌넣기 식의 주먹구구식으로 이 엄청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 점은 용서받지 못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햄릿 또한 잘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법이 통하지 않는 햄릿의 시대, 복수만이 과연 진정한 답인가


아버지의 죽음을 숙부가 저질렀다는 것에 혈안이 되어 햄릿은 숙부인 클로디어스를 죽일 것인가,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고뇌하였지만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 다시 조사를 하여 증거품을 찾아낸 후 법을 통해 복수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살인을 살인으로 갚으려 했던 그 방법이 타당하지 못했다고 본다.

특히 햄릿 때문에 오필리아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가 죽게 되는 장면은 아무리 전제왕권의 세대였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생명에 있어 귀한 것과 천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주 간단히 미친 상태에서 그를 죽였기 때문에 햄릿은 잘못이 없다는 점을 들먹이는 구절은 불편함이 느껴진다. 법이 소용이 없는 그저 무용지물이 되버린 시대는 썩기 마련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햄릿의 비극적인 결말이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폴로니어스의 죽음이후 오필리아는 정신을 놓게 되고, 그 모습을 본 레어티즈가 클로디어스와 함께 햄릿을 죽이는 또다른 복수 극을 꾸몄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햄릿' 속에서는 두가지의 복수가 등장하는 셈이다. 하나는 햄릿이 숙부에 대한 복수와 레어티즈가 아버지를 죽인 햄릿을 죽이고자 하는 복수이다. 그런데 레어티즈의 복수에는 클로디어스의 더러운 계략이 들어가 있기에 앞서 말했듯이 비극의 결말로 치닫게 되었다.

만일 클로디어스가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명예롭게 죽을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레어티즈의 복수에 자신의 죄를 덧씌어 햄릿을 죽이려 한 점으로 인해 이 시대의 썩은 모습은 더 극명하게 들어난다. 법이 있다고 보기 힘든 그 시대와 모습은 다르지만 오늘날 가진 자의 위치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노력하는 일부 검사, 변호사 그리고 판사들이 있다는 점은 안타까울 뿐이다. 이들같은 불멸의 신성가족들은 칼만 들지 않았을 뿐 결국 법이라는 무기로 힘 없는 자들을 짓밟고 있어 문제가 더 크다고 한번쯤 돌이켜 봐야 하지 않을까.


햄릿의 시대를 통해 바라보게 되는 우리의 시대


'햄릿'은 햄릿 왕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하는 햄릿 왕자의 고뇌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왕권에 대한 신하들의 도전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왕의 모습과 또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으려는 남성들의 퇴폐한 모습도 또한 그려져 있다. 그렇기에 여성에게 정절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점이 든다. 신하들은 왕들을 견제해야 왕권에서 전제군주가 나오지 않음에도 결국 신권을 무시한 나라들은 전제군주정치를 선포하고 왕이 마음대로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셰익스피어는 재고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것이 당연한 듯 햄릿을 통해 내뿜고 있다. 바로 햄릿이 폴로니어스의 시체를 끌고가며 뱉어낸 대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양반은 이제야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엄숙해졌군요. 살아 있을 적에는 어리석은 수다쟁이였는데.
죽음에 대한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는 용서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힘을 가진자들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힘이 없는 자의 생명줄도 앗아갈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이 '햄릿'에서 가장 끔직한 비극이라고 본다. 우리네의 삶은 어떨까. 과연 나는 나의 의지대로 살아가며 또한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얼마 전 저축은행 사건을 보면 서민들은 늘 당하고 살고 있음이 드러난다.

여성의 정절에 대한 강요에 대해서는 어떤가. 남성의 정절은 이 시대에서 묻지 않으며 마치 남자는 그럴 수도 있음을 드라마에서 까지 보여주고 있다. 여성은 항상 깨끗해야 하고, 남성은 아무렇게 살아도 묵인해주는 이런 사회의 모습-특히 남성의 외도 속에 있는 여성들끼리만 싸우는 모습-이 '햄릿'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음에 더 비참함을 느낀다.

때문에 '햄릿'은 잊혀지는 문학이 아니라 현재에도 재해석됨을 느낄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햄릿 공연을 놓친 분들이라면 원작인 '햄릿'을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본다. 작품 자체에서 느껴지는 비극과 현실의 비극의 간극은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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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imo 2011/12/14 20:15 # 삭제

    아직 제대로 읽어본적은 없었는데,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책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공연으로 먼저 봐야겠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간이역 2011/12/15 21:50 #

    공연을 보고 책을 읽으면 더 재미있더라구요.
    원작 소설이나 희극이 있으면 보기 전에 영상이나 연극을 먼저 보고
    읽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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