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미라클' - 영화 '사랑과 영혼'과 다른 이유 + 공연 읽어주는 역장



지난 주 토요일에 대학교 동창들을 만나게 되었다. 말이 동창이지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사실 인생에서는 선배들인 그들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이유도 이런 공연문화를 좋아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미라클 씨어터에서 토요일 오후 4시에 보았던 뮤지컬 '미라클'은 우리에게 기적에 대해 나름 접근해 가도록 했다.



그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미라클'에 대해 지금부터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스포일러 주의

소재는 익숙한 이야기
하지만 전달하는 방식은 달라


뮤지컬 '미라클'을 본 분들은 이 뮤지컬을 접하면서 생각나는 영화가 있을 것이다. 바로 데미무어 주연의 사랑과 영혼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그 영화의 내용대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소재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이름과 달려나 하니의 캐릭터 이름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익숙한 소재와 익숙한 이름으로 인해 관객에게 거부감을 들게 하지 않으려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연출의 의도대로 다른 공연들과 달리 조금 빠르게 극에 몰입할 수 있긴 했다. 처음에는 병동에 누워 있는 인형때문에 호기심이 들었지만 그 인형의 영혼으로 나오는 '희동'이라는 한류 가수 캐릭터의 대사 때문에 이 극이 영화 '사랑과 영혼'과 같은 류의 기적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맥은 빠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소재가 반복이 되는 건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이런 놀라운 현상을 자신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어떤 판타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점을 이 뮤지컬은 잘 잡았고, 의미도 두세번 생각해 보게 한다.

희동을 간호하는 간호사와 의사들의 이야기이지만 유독 희동을 따스하게 보살피는 간호사인 '하늬'를 희동은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좋아하는 마음을 전달할 기회가 없어 답답해 하던 그 순간 옆방의 한 아저씨가 등장을 한다. '홍길동'이란 이름을 가진 이 아저씨는 어떤 인물인 것일까 궁금해 하던 찰나 그 아저씨 역시 희동과 마찬가지로 식물인간이었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그런데 희동과는 달리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인지 신기해 하는 희동에게 '자신은 2년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가 산소호흡기를 달면서 물건도 만질 수 있고 자신의 육체에서 반경 50m까지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며 이야기를 건넨다.



'이것이야!' 라며 희동은 이 홍길동이라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하늬 간호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에 이른다. 사랑과 영혼에서는 우피 골드버그가 촉매가 되어 산자와 죽은자의 경계를 무너뜨렸지만 이 극에서는 죽어가는 자가 죽어가는 자와 산자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심이 들지만 꼭 그들이 죽어가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렇기에 이 극을 영화 '사랑과 영혼'과 내용이 비슷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도 식물인간인 그대에게 물어요
당신은 살고 싶은가요?


이 극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문제작으로 볼 수 있는 건, 이 극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과연 인간이 마음대로 식물인간이 된 그들의 생명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기 때문이다.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아내가 너무 힘들어 해서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은 살아 있다고 알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죽음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하지만 희동이라는 캐릭터는 교통사고를 당해 가족들이 없는 상황에서 소속사에서는 병원측의 판단으로 뇌사판정을 받게 한다. 결국 동공의 초점이 없고 기척이 없다는 판단에 의해 다시말해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더이상 돈 낭비가 되는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려말할 필요는 없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제일 중요한 곳이 병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작금의 병원들은 환자 중심이 아닌 돈 중심으로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다.

물론 이 극이 그렇게 심각하게 현실을 비판하고 있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로맨스가 위주로 되어 있지만 이 '뇌사판정'의 소재를 넣음으로써 더 이뤄질 수 없는 그들의 아픔에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아픔의 원인이 뇌사판정에서 나오기 때문에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가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물인간이 된 환자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극에서는 식물인간인 그들도 적어도 '살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요?'라고 묻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라면 식물인간인 그들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 경제적인 문제는 어렵긴 하다. 나 역시 병동에 입원한 그 환자의 입원비를 몇 년 동안 낼 수 있을만큼 돈을 아직 모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생각은 해달라는 것이다. 식물인간인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니라 우리처럼 계속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볼때 우피 골드버그의 역할을 그 홍길동이라는 아저씨 캐릭터가 했음에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죽은 자가 죽은자에게 몸을 빌려 준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자에게 조금 더 그 시간을 오래 거쳐 온 선배로서 몸을 빌려주어 사랑을 이루게 했다고 이 극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 고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기적은
어떤 것인가요?


그렇다면 왜 희동은 깨어날 수 없었던 것일까. 희동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하늬씨. 나를 봐요. 어쩌면 기적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봐요. 내가 깨어나서 얻어지는 기적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것이 기적이었나 봐요. 그래서 더 행복해요.


직접 무언가를 같이 해보지도 못했음에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이 애잔하다. 그런게 기적이라면 너무 아픈 것이 아닐까. 하지만 더 아픈 건 남아있게 된 하늬 간호사의 깊은 떨림과 추억에 있다. 살면서 그러한 놀랄만한 기적을 추억해야 하는 그녀는 과연 그 뒤에 감당을 할 수 있었을까 걱정을 하게 되었다.

작은 만남을 통해 기적을 선사했지만 그 작은 기적 이후로는 아파해야 하는 단계가 온다는 것은 너무 가옥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지만 말이다. 이 뮤지컬 극을 보신 분들이나 보지 않더라도 '기적'에 대해 생각해 보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소재고, 또 극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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